일빠, 이병철 회장, 그리고 마틴 루터 킹

"이상향 아나스타샤" 님이 전하는 일빠 블로그를 일본에 온지 며칠 안 되서 읽는 기분은 조금 묘하다. 표현의 문제는 분명히 있고, 또한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본이라는 나라가 좋은 것 일색인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가 맹목적인 "일빠"로 전향하는 데 일조했을 그 "차이" 라는 것은 여기서 나도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살고, 나라 자체도 몇 배는 더 크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국민들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어제 저녁, 요코하마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청년을 보게 되었다. 재미있는 입담과 몇 가지 공연으로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여흥거리를 선사한 것까지는 우리나라 대학로에서도 가끔은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그 청년에게 주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었다. 아무도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간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한국인인 나는 "이건 일본인 특유의 남 눈치보는 행동일 뿐일거야" 라면서 애써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행동은 꽤 재미있는 길거리 공연을 본 데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자발적으로 지불하려는, 매우 순수한 의식의 발로였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행동을 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래서 일찍부터 일본을 경험했던 삼성의 이병철, 이건희 회장이 그토록 신입사원들에게 예절 교육을 강조했나보다. 그분들은 일찍부터 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은 단순히 경제만 발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의식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아무리 목아프게 외쳐봤자 사회 전체가 기업인 한 명으로 바뀌긴 매우 힘들므로 자기들의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칠 수 있는 집단, 즉 삼성그룹부터 실제로 변화를 시켜보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 되었고, 삼성맨들은 깔끔한 엘리트 대우를 받고 있으며, 기업 실적면에서도 삼성은 일본의 전자회사들을 능가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삼성이야말로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아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중 하나인 "일본 이기기" 라는 공식의 답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일본의 장점을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더 빨리 했다. 적어도 일반적으로 볼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 빠르고 성급하지는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주식회사" 대표님 표현에 따르면, 적의 발달된 근육은 아무리 때려도 아무런 임팩트를 줄 수 없지만, 적의 급소는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깨갱거리게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일본의 급소가 "일단 저지르고 보자" 는 진취적이고 빠른 태도를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특성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일본 이기기의 공식은 일본을 배워서 그들처럼 하되 더 빨리 하는 것,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선진국이다. 경제뿐 아니라 문화, 의식,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여기 와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잘 산다고 해서 "아이 러브 닛폰" 이라고만 하는 것은, 마치 반에 잘 사는 애가 있는데 우리집을 놔두고 걔네집에 가서 "나는 니네집이 너무도 좋아... 깨끗하고 크고, 먹을것도 많고.." 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흑인 해방이 있기 전, 많은 흑인들의 꿈은 빵빵한 에어콘이 나오는 쾌적한 백인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밭에 가서 하루종일 일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 일침을 놓은 것이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왜 그것밖에 꿈꾸지 못하는가? 바로 당신들이 에어콘이 잘 나오는 쾌적한 집에서 주인으로 살 것을 꿈꾸어야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 흑인들은 그런 작은 꿈밖에 꾸지 못했을까 이해가 선뜻 가지 않지만, 우리가 만일 "한국은 안돼... 일본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어" 라고 체념한다면 에어콘 딸린 집을 영원히 못 가질거라 단념했던 흑인들과 같은 행동을 우리도 하는 셈이 된다. 이는 이병철 회장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서 호통을 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본이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해도 되지만 일빠는 되서는 안되는 이유다.

덧. 옆의 방에 묵고있는 BKlove 님에게 뭐하고 있냐고 물어보니 동경 도착기 블로깅 한다고 한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