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문돌이

이를테면 금요일 밤 11시. 좋은 사람들과의 훈훈하고 떠들썩한 저녁이 파한 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마치고 나서 PC앞에 앉아있는 시간. 주말 전야만이 줄수 있는 고즈넉함의 끝자락이 다 사라지기 전에 문고리에 잡아 매놓기라도 하고 싶어지는 시간이라면, 여러분들은 보통 무얼 하고 싶어지시는지? 내 경우, 그건 바로 "글쓰기"다.

두달쯤 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자기 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한 몇초간 약간의 막막함이 느껴졌다. 워메, 날 어떻게 소개해야 하지? 그때 내 앞에서 자신을 소개한 누군가가 자신은 "뼛속까지 공돌이" 라는, 예의 그 표현을 썼다. (보증컨대, 그는 뼛속까지 공돌이 맞다.) 그때 바로 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던 생각은, 어쩌면 나는 "뼛속까지 문돌이"는 아닐까 라는 -- 그당시 분위기로 따지자면 더없이 발칙하고 반항적인 생각이었다.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 중 반 이상이 엔지니어었다는;;) 

그러니깐 그 짧은 시간에, 평소에 장기 메모리 공간에 묻어둔 상태로 잘 꺼내보지 않았던 기억들이 갑자기 떠올랐던 거다. 그래, 고등학교 2학년때 눈이 무척 많이 오던 날 첫번째 개인 문집이랍시고 그걸 내기 위해서 학교 근처 제본소를 들락거렸던 적도 있었지.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1년 반동안 "표문연 (표본실의 문학 연구소)" 이라는 동아리 생활도 나름 열심히 했었고... 

지금껏 글재주는 없지만, 글쓰기라는 대상에 대한 열정만은 컸던 것 같다. 대학시절의 나는, 이를테면 헤밍웨이가 쿠바의 한 호텔에 오랫동안 투숙하면서, 후텁지근한 방에서 이빨까지 시린 칵테일을 마시며 입에 시가를 문 채 타자기로 작품을 써내려갔다는 식의 이야기에 너무도 쉽게 매료되곤 했었다. 20대 후반, 팍팍한 직장생활이 힘들어 질때면 어느날 훌쩍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록키산맥의 침엽수 숲속에 자리잡은 조용한 통나무집의 전망좋은 2층 방에서, 수도사들의 그것과도 같은 간소한 삶을 살면서 정화된 마음으로 내면의 글쓰기를 하고 싶은, 지금 생각해 보면 "되도않는 상상"을 벌이곤 했었다. (그래, 어차피 상상인데 좀 인터내셔널하게 놀면 어떠랴.) 

나는 지금 참 특이한 감수성을 가진, 뼛속까지 공돌이인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있지만, 실은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뼛속까지 문돌이인지도 모른다. 그 자기소개의 시간, 비록 한 0.5초간이었지만.. 성(性)이나 인종이 아닌 "카테고리"에서도 소수자로써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돌이의 성향을 가졌던 나는 어찌된 일인지 대학에선 자연과학을 전공했고, 일은 IT쪽 일을 해오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더이상 이보다 공돌이적일 수는 없는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다니... 물론 이런 트위스트가 없다면 인생의 페이쏘스적인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지만. 

한날 선생님의 글을 보고 나서 문득 생각나서 쓰는, 아무 쓸데없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