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큐라 인테그라 1994

주말이니까 가벼운 포스팅 하나. 요새 "응답하라 1997"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가끔 삐삐같은 추억의 물건들이 등장하는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근데 추억의 물건이 여전히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특히 이곳 캘리포니아는 기후가 그다지 극단적이지 않아서 일이십년전 자동차들도 꽤 좋은 상태로 돌아다니곤 한다.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때로 영화와 자동차가 그렇다. 둘다 구체적인 연도와 매칭되어 있고, 관련된 사람들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가끔 CGV 사이트에 들어가서 과거 예매 목록을 보면서 "이 영화는 OO랑 XX랑 봤었는데... 그리고 끝나고 이거 먹으러 갔었고. 그게 벌써 이렇게 됐나?" 이런 추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물건인 자동차 중에서, 오늘 소개하고 싶은건 아큐라 인테그라 1994년형이다. 일본은 지금도 물론 차를 잘 만들지만 90년대 초반의 일본차들은 지금 봐도 경이로울 정도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차의 단차 없는 실내조립에 도대체 계기판에 동전을 꽂아둘 데가 없다고 불평할 정도였고, 디자인 역시 일본차가 세계 흐름을 주도할 정도였다. 90년대 초에는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계를 점령할 기세로 무섭게 올라가는 흐름의 정점에 있었다. 포브스지의 세계 최대 부자가 일본사람이었고, 미국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일본 관련된 (자못 경계심 어린) 책들이 있었다. 물론 그 뒤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맞이하게 되지만.

미국이란 나라에 처음 와본게 1993년. 당시 코넬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형과 함께 살면서, 여름방학때 코넬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랑 동갑내기 친구를 하나 만나게 되었다. 이 친구는 나랑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그당시 벌써 코넬을 졸업하고 펜실베니아 의대로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천재 기질이 있어서 학교도 일찍 들어간데다 공부가 특히 어렵다는 코넬에 다니면서도 월반 비슷한 걸 한 모양이었다. 4개국어 하는것도 모잘라서 틈틈히 자기가 알바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새차마저 자기 힘으로 산, 같이 있으면 아주 비교되고 따라서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을 유발시키는 친구였다.

그때 그 친구가 여름에 산 차가 그때 막 등장한 아큐라 인테그라 1994년형이었다. (94년형은 93년 여름부터 판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니 대략 이렇다.






저 차가 20년전에 처음 개발된 차라는 것이 믿어지는가. 지금 봐도 디자인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차체 디자인은 비례가 적절하고, 내부 디자인 역시 시대를 한참 앞선 디자인이었다고 본다. 저 모델 자동차는 지금도 캘리포니아에서 꽤 굴러다닌다.

비교를 위해서 미국차중 하나인 chrysler Lebaron 이라는 모델은 1994년형이 이렇게 생겼었다. (놀랍게도 이 모델 역시 1994년에 처음 데뷔한 모델이라고 한다.) 뭔가 미국 영화 추격씬에서 무기력하게 찌그러지는 차로 자주 등장하던 디자인.



친구랑 나는 저 차를 타고 이타카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길거리 다닐때 마치 여자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스무살 갓된 남자들만 할수 있는 치기어린 착각을 하면서.

나에게 93년 여름은 그렇게 진한 추억을 남기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코넬 캠퍼스, 처음 가본 미국이라는 나라의 생소하지만 강렬한 매력, 같이 어학연수 갔던 팀들과의 재미있는 기억들, 난생 처음 외국인들과 밤새 해본 파티. 나보다 인생의 발걸음에서 앞서 있었던 친구를 보며 나도 그친구처럼 빨리, 더 많은걸 이루고 싶다는 스무살짜리의 꿈...  이런 키워드들이 버무려져서 아련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나의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그때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이 모든게 지금도 심심치 않게 굴러다니는 아큐라 인테그라 1994년형을 볼때 가끔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다.  그랬던 93년 여름이 벌써, 눈 깜박할 사이에 20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으니, 세월이란건 정말 쏜살같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