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이라는 시간


삼성에서 오래전 같이 일하던 동료가 근처로 출장 왔다고 한다.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다. 내가 지난 몇년간 살아왔던 세월의 두께를 그대로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와 내가 마주치지 못했던 몇년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이런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동창회에 나가는 일이 썩 즐겁지만은 않지만, 언젠가 동창회에 나간다는 생각 자체가 자극을 준다는 누군가의 말도 떠오른다. 오래전에 들었던 말이 기억난다는 건 그 말을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만일 내가 그 얘기에 공감했다면, 그 공감을 비단 “누가 잘나가고 누가 못 나가고”의 속물적 차원으로만은 보고싶지 않다. 뭐랄까, 중년을 향해 가는 나이라고 해서, 마치 물 밖으로 나온지 오래되서 더이상 펄떡거리지 않는 물고기처럼 퍼질러진 삶을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랄까? 그걸 위해 좋은 방법중에 하나는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는 가상의 순간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것일수도 있다.

우린 만났고,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서 커피 한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같이 일했던 누군 지금 뭐 하고 있으며, 누군 또 뭘 하고 있다, 그때  자주 갔었던 그 음식점 지금은 확장 개업해서 완전 잘된다, 그때 옆자리에서 내가 계속 우산 떨어뜨렸던거 기억나냐, 뭐 이런 이야기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지만, 6-7년의 세월은 오히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일수록 아련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생각한다. 맞아, 우린 그때 젊었었구나.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던 시간들이었지만, 나름 치열하게 그 시간들을 이겨낸 우린 어쩌면 꽤 괜찮고 멋진 젊은 시절을 보냈던 걸지도 모르는 거구나.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들.. 왜 나는 그때 미래의 꿈에만 그토록 사로잡힌 나머지, 소중한 현재에서의 관계들을 보다 충실히 하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서 굳은 표정으로 아무일도 없는듯 겉치장을 하고 내 감정에 온연히 충실하지 못했을까. 왜 내 힘들다는 얘기만 했지, 남들이 기댈수 있는 어깨가 된적이 없었을까.

다시 현실로 컴백.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예전에 삼성에서 있을때 같이 일하던 거의 모든 분들이 아직도 여전히 삼성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 역시 좋은 회사인게 분명한듯! 그에 반해 지난 몇년동안에만도 벌써 몇번의 큰 인생 변화를 거치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혹시 내가 이상한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하지만 이내 내 삶에, 그리고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살지만 이럴때마다 내 안에 존재한다는걸 깨닫게 되는 나의 노매드 근성에, 너무도 감사하게 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비교적 다양한 색깔의 삶을 겪고 있는 중이니. 한번의 삶, 경험 말고 뭐가 있겠는가.

어느덧 우리는 우리가 완전 윗사람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다는걸 느꼈다. 그러기에 더욱더 잘 살아야겠다.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윗사람으로 기억되기가 쉽지 않은 거라는 걸 이젠 조금은 알수도 있을것 같다. 내가 좋아라 하는 이고잉의 말처럼,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해대는 결혼과 출산 이런게, 막상 내가 하려면 전쟁준비와 다름 없는게 인생인 거고, 소위 말하는 선배짓이란 것도 그런것중의 하나인 것 같다.

커피숍에서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오후가 느즈막해질 수록 더욱더 고운 빛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이 햇살... 만일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날 거라면, 햇살 가득한 날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몇년전으로 돌아가는 아릿한 상념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기에. 우린 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또 만날걸 기대하면서, 쳐진 중년의 뱃살같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