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기획자들

요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라던데 (아직까지 제대로 못본 1인)... 얼마전, 어떤 지인분과 이야기 나누던 도중 우리도 “그때 그시절”을 떠올리던 기억이 난다. 그건 바로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소위 “닷컴 시절”을 거치면서 새로운 직군으로 떠오르던 우리들 “기획자들”에 대한 기억.

그당시 기획자라는 직군은 딱히 정의하기 힘들었던것 같다. 대략 IT 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코딩이나 디자인같은 특별한 재주는 없고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술마시면서 영업해서 돈 벌어오지도 않는 애매한 사람들? 정의 자체가 애매했던지라, 개중에는 뭣도 모르고 주워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해서 말하던 어중이 떠중이들도 있었던게 사실. (아니면 아버지가 사장님 친구라서 IT 기업에 갑자기 들어온 일부 자제분들이라든지)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이제 새로 열리는 신세계를 감지하고, 마치 콜럼버스가 미지의 세계로 배를 띄우듯 자신의 인생을 새 분야로 과감히 던졌던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추억하는 건 그랬던 치열한 고민과 공부와 토론의 시간들이다.

우린 데이빗 앤 대니의 블로그와 이메이징 잡지를 열심히 구독했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웹디자이너와 굳이 ICQ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이트온으로 갈아탔던..) 채팅으로 하루종일 얘기하면서 서비스를 만들어 갔으며, 멋진 파워포인트 템플릿 디자인 몇개를 하드디스크의 “참고자료” 폴더에 소장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모델 연구회” 등의 프리챌 동아리에서는 와이어드 잡지 기사 한꼭지를 숙제로 읽고 오라고 선배들이 그랬었는데, 사실 이론적 레벨에서의 추상적 토론에 불과했지만 그 진지함과 열정만큼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케이스 스터디에 버금갔고, 그렇게 밤늦게까지 토론한 사람들만이 느낄수 있는 동료의식이 때로는 우정의 형태로, 때로는 이성간의 정분(?)의 형태로 싹트곤 했었다.

곧이어 코스닥 열풍이 꺼지고 닷컴 버블이 가라앉으면서 개중에는 먹고 살길을 찾아서 다른 분야로 전직한 이들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많은 분들은 업계에 남아서 지금까지 쟁쟁하게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닷컴 붐이래봤자 고작 십수년전 전의 이야기니까.

아무튼. 건축학 개론과 “응답하라..”의 시기에, 그때 그 치열했던 시절을 잠시 떠올려 본다. 나무의 나이테가 나무에게 힘든 시기에 더 진해지듯이, 우리네 인생도 여물게 산 기억들이 나중에 더 진한 추억으로 남는것 같다.